제2장

김지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강태준은 서명을 마친 서류 한 부를 챙기고, 나머지 한 부는 김지연에게 남겨두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혼 신고는 당분간 하지 않겠어. 우리 일은 일단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군. 회사 신제품 발표회가 코앞이라 어떤 돌발 상황도 용납할 수 없어. 특히 할아버님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지연이 말을 가로챘다.

“걱정 마세요. 할아버님께는 비밀로 할게요. 만약 윤진아 씨 쪽에서 필요하다면 제가 대신 설명해 줄 수도 있고요. 돈 받은 만큼 일은 해야죠.”

강태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비꼬는 투로 대꾸했다. “그럼 수고 좀 해 줘. 정말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김지연은 목이 메어오고 속에서 신물이 울컥 올라왔다. 그녀는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 앞에 쭈그려 앉아 속을 다 게워냈다.

아침 식사는 그렇게 불편하게 끝났다.

강태준은 먹다 만 샌드위치를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김지연은 그의 다부지고 훤칠한 뒷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는 고급 맞춤 수트를 입고 카페로 들어섰다. 날카로운 눈매와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 오뚝한 콧날까지. 신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만큼 잘생긴 그의 모습에 그녀는 첫눈에 반해 버렸다.

강 회장님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그날 바로 혼인 신고를 했다.

신혼 첫날 밤, 그는 계약서 한 장을 던지며 말했다.

“나한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당신과 결혼한 건 순전히 할아버님 성화에 못 이겨서야. 이 계약서 읽어 보고 문제없으면 사인해. 우리 결혼은 외부에 알리지 않을 거고, 3년 뒤에 좋게 헤어지는 거야. 돈 말고는 당신한테 줄 수 있는 게 없어.”

그는 말한 대로 행동했다. 3년 동안 카드를 던져주며 마음껏 쓰게 했을 뿐, 단 한 톨의 감정도 베풀지 않았다. 부부로서 의무를 다할 때조차 그 차가운 얼음장 같은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가 자신과의 결혼에 동의한 것도 윤진아와 7할은 닮은 이 얼굴 때문이었으리라.

김지연이 생각에서 벗어났을 때, 그녀가 실수로 건드린 우유가 반이나 쏟아져 있었다.

유 아주머니가 황급히 다가와 뒷정리를 했다.

“사모님, 평소엔 성격도 좋으시면서 오늘따라 왜 그러세요. 말을 좀 참으시지. 부부 싸움에 어디 헤어진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해요. 제가 보기엔 사장님도 진심으로 헤어지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던데. 서명할 때 얼굴이 얼마나 굳어 있었는지 못 보셨어요? 이 늙은이 말 듣고, 오늘 밤에 사장님한테 슬쩍 져주세요. 그럼 이 일도 그냥 넘어갈 거예요.”

김지연은 티슈 한 장을 뽑아 흐려진 눈가를 닦았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이 일이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네요.”

윤진아는 시종일관 그녀의 마음속에 박힌 가시처럼 그녀를 아프게 찔렀다.

식사를 마친 김지연은 재빨리 짐을 챙겨 청원동 빌라를 나섰다. 택시를 타고 나서야 그녀는 그를 떠나니 마땅히 기댈 곳 하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 호텔이나 가 주세요.”

그녀는 기사에게 말했다.

그 시각, 강태준은 회의를 하던 중 유 아주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는 회의 중에 방해받는 것을 가장 싫어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사모님이 캐리어를 끌고 나가셨어요. 제가 말릴 틈도 없었네요. 얼른 사람 시켜서 찾아보세요. 아직 멀리 못 가셨을 거예요.”

전화기 너머로 유 아주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몹시 심란했다.

아직 이혼 절차도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김지연이 서명을 마치자마자 말도 없이 떠나 버릴 줄은 몰랐다. 그녀의 단호함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3년이나 한 침대를 썼는데, 그녀 마음속엔 헤어지기 전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정조차 없었단 말인가?

그는 그녀가 울며불며 매달리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랬다면 그가 체면을 구기고서라도 조금 달래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고, 마치 이혼을 그보다 더 서두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가 종종 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그 민준 오빠라는 작자가 떠오르자, 강태준의 속은 마치 레몬을 한가득 쑤셔 넣은 것처럼 시고 더부룩했다.

“됐습니다.”

그는 유 아주머니에게 차갑게 세 마디를 뱉고 전화를 끊었다. 회의실로 돌아온 그는 굳은 얼굴로 오늘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다고 선언하더니, 강정우 비서를 따로 불러냈다.

“사모님이 어디로 갔는지, 최근에 누굴 만났는지 알아봐.”

말을 뱉고는 스스로 정정했다. “아니, 김지연 씨.”

강 비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오늘따라 자기 상사의 기분이 왜 이리 좋지 않은지 알 수 없었지만, 사모님과 관련이 있을 거라 어림짐작했다. 지난번 사모님과 다투고 출근했을 때도 지금처럼 사람 잡아먹을 듯한 흉흉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강 대표님, 통화 기록까지 확인해야 합니까?”

“그래. 그리고 접촉한 사람 중에 이름에 ‘준’ 자가 들어가는 사람도 전부 다.”

“알겠습니다.”

강정우는 명령을 받자마자 서둘러 움직였다.

강태준은 지시를 내리고 나서 유 아주머니가 보낸 메시지를 보며 턱선을 단단히 굳혔다.

유 아주머니: [사모님께서 이걸 두고 가셨어요.]

문자 아래에는 그의 부카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가 돌려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알아서 돌려주고 간 것이다.

말 한마디 없이 떠나다니, 잘했다. 강태준은 홧김에 그녀의 카드를 정지시켜 버렸다.

돈이 떨어지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김지연이 호텔 프런트에서 체크인을 마치고 결제하려 할 때, 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누가 벌인 짓인지 알아차렸다.

방을 잡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결국 캐리어를 끌고 친구인 유수현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수현, 성별 남자, 취향 남자. 김지연의 ‘여사친’ 같은 존재였다.

전화를 끊은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유수현이 차를 몰고 나타났다. 그는 길가에 서 있는, 화려한 미모와 달리 처연한 표정의 여자를 보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투덜거리며 차에서 내려 그녀의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왔다.

“내가 예전부터 말했지. 남자 고를 때 잘생긴 놈, 돈 많은 놈, 성질 더러운 놈은 거르라고. 넌 아주 그냥, 지뢰란 지뢰는 한 번에 다 밟았구나. 그 예쁜 얼굴이 아깝다, 아까워. 그놈 따라가서 3년 동안 고생했는데, 고작 이 짐 쪼가리 하나 쥐여주고 쫓아냈다고? 이렇게 쪼잔한 재벌 총수는 난생처음 본다.”

충고는 귀에 거슬리는 법이라 했던가. 유수현의 잔소리가 쏟아졌지만, 지금의 김지연은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있고 싶을 뿐이었다.

“수표도 한 장 줬어. 금액은 내가 직접 채워 넣으라고 하더라.”

김지연은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뜨고 힘없이 말했다.

유수현은 한 손으로 운전하며 쉴 새 없이 욕을 퍼붓다가, 강태준 그 쓰레기가 수표를 줬다는 말에 비로소 비난을 멈췄다.

“너 잘 들어. 만약에 190억보다 적게 쓰면, 내가 너 사람 취급도 안 할 줄 알아.”

“그럼 네 말대로 190억 적을게. 우리 지금 당장 찾으러 갈까?”

유수현은 그녀가 농담하는 줄 알았지만, 김지연은 정말로 구겨진 수표를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일억’이라고 휘갈겨 썼다.

그녀의 은행 카드에는 자신이 아르바이트로 번 돈만 들어 있었다. 강태준과는 단 1원도 관련 없는 돈인데, 무슨 자격으로 제멋대로 카드를 정지시켜서 집도 없이 호텔에도 못 묵게 만든단 말인가.

김지연은 화가 치밀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인다면, 그녀가 욕심을 부리는 것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은행 가자. 돈 찾게.”

유수현은 핸들을 돌리며 눈을 반짝였다. “지연아, 이 오빠가 살면서 그렇게 큰돈은 본 적이 없는데. 우리 이 차에 190억이 다 실리긴 하냐? 일단 차부터 대형 SUV로 바꿔야 하는 거 아니야?”

“나도 본 적 없어. 우리 오늘 구경이나 한번 해 보자.”

강씨 그룹 대표이사실.

강태준이 건성으로 서류를 보고 있을 때, 강 비서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알아냈나?”

강 비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

강 비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강 대표님, 사모님께서 은행에서 돈을 찾고 계십니다.”

강태준은 의아했다. 방금 그녀의 카드를 정지시켰는데, 무슨 돈을 찾는단 말인가.

강 비서는 또박또박 말했다. “사모님께서 대표님께서 주신 수표로 190억을 인출하려 하십니다. 금액이 워낙 커서 은행 측에서 함부로 처리하지 못하고 대표님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강 비서는 자기 상사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 몇 글자는 거의 이를 악물고 내뱉는 소리 같았다.

사모님이 대체 무슨 깡으로 감히 강 대표님을 도발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사실을 전달했을 뿐인데도, 강 대표님이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웠다.

강태준은 마시던 커피에 사레가 들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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